AI 시대, 호모 파베르 위한 일터 학습 전략

물건을 만들던 일터가 이제 사람을 키우는 배움터로 바뀌고 있다. 현장 중심의 실천적 교육법인 ‘스캐폴딩 교수법’이 일과 학습이 융합된 새로운 인재 양성의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대의 일터 학습은 특정 분야의 스킬 전달 그 이상의 경험을 창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셔터스톡]
2020년 OECD 보고서는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적자원개발(HRD) 제도의 변화가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AI로 인해 일의 세계가 재편되고 있고, 조직은 변화하는 역동적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확인하고 해석하고 학습하는 전략적 학습 역량을 필요로 한다. 일터 내의 개인은 성장 마인셋(Growth Mindset)을 장착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Clarke(2005)이 정의하는 일터 학습(workplace learning)을 살펴보면, 학습은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OJT, 그룹 수준에서 일어나는 Group OJT, 직장 외에 일어나는 Off-JT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현재와 미래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직무 능력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 교육 등 다양한 유형의 경험 학습 활동에 참여하는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일터 학습에 참여하는 현대 사회의 학습자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정치 철학가인 한나 아렌트는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와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 인간을 구분한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굴레를 짊어진 짐승처럼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 즉 일하는 동물이다. 호모 파베르는 다른 종류의 일, 즉 공동의 삶을 만드는 인간의 이미지다. 라틴어로 호모 파베르는 제작자를 뜻한다. 일차적으로 생산에만 몰두하는 인간은 자칫 도덕적, 윤리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면, 이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넘어, 타인과 어울려 토론하고 판단을 시도하는 존재이다. 라틴어로 제작자를 뜻하는 호모 파베르는 바로 이러한 공동의 삶을 건설하는 인간상이며, 일터 학습은 개인이 이 호모 파베르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원하는 데 그 지향점을 둔다.
현장 기반 학습과 스캐폴딩
현대 사회에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호모 파베르의 삶은 계속된다. 물건을 만드는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학습 모델은 무엇이며,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단순히 일을 하고 물건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역할만이 아닌 새로운 지식과 스킬을 학습하고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일터에서 개인의 학습을 지원하는 학습 모델이 필요하다.
심리학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더 유능한 조력자(교사, 멘토 등)가 임시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학습자가 숙달되면 그 도움을 점차 줄여 나가 학습자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교수법을 스캐폴딩(Scaffolding)이라 하는데, 이러한 스캐폴딩이 교실이 아닌 물건을 제조하는 일터에서도 가능할까?
스캐폴딩은 멘토가 특정 분야의 정보나 지식, 스킬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지만 멘티의 성장 과정에 적절한 수준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변화하는 미래 사회의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Education 4.0 Taxonomy’를 제시하고 있다. 창의성, 문제 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와 같은 역량들은 단독으로 개발될 수 있는 역량은 아니며, 일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과제나 과업을 수행하며 학습될 수 있다.
Education 4.0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산업계가 요구하는 역량은 교육 현장과 일터 현장 기반의 조화로운 거버넌스에 기반한 학습 모델을 통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Education 4.0 시대, 실질적 역량 개발을 위한 현장 기반 학습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으며, 산업계-교육 현장 간 협력적 거버넌스를 통한 학습 모델 구축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강조하는 핵심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실제 업무 환경에서 이를 직접 경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학습 환경과 모델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도제 훈련이 미래를 만든다
필자는 지난 6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울스터 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인 UFHRD(인적자원개발 대학포럼)에 다녀왔다. 그곳의 기조 강연자의 발표에서 소개된, 16세의 도제 훈련생은 입사 이후 중장년으로 성장하여 북아일랜드의 전력망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회사(NIE Networks)의 임원이 되었다. 도제 훈련생에서 임원이 된 중장년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스스로 육성하여 키우고자 하는 인재 육성 정책이 잘 작동하는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영국은 중세 시대의 길드가 발전하여 전문적인 협회나 단체로 성장했고, 이러한 전문 직업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고등 도제 훈련 체제를 구축하여 대학과 산업계가 협력적 거버넌스 관계를 토대로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가 방문한 벨파스트 메트로폴리탄 대학은 1906년 설립되어, 조선업과 엔지니어링이 주요 산업이었던 벨파스트 지역의 핵심 교육 기관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7년에는 캐슬레이 대학과 합병하여 현재의 벨파스트 메트로폴리탄 대학으로 재탄생했다.
고등 도제 훈련(Higher Apprenticeship)은 직장 내 실무 훈련과 학문적 학습을 결합하여 대학교 수준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교육 프로그램이다. 이는 전통적인 대학 학위의 직업 훈련 대안이다.
견습생들은 급여를 받고 귀중한 업무 경험을 쌓으며 공식적인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이러한 견습 과정은 고용주, 대학교, 그리고 전문 기관들이 협력하여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숙련된 직업으로의 경력 경로를 제공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벨파스트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고등 도제 훈련, 학사 학위 과정, 파운데이션 디그리, 오픈 유니버시티 등은 일과 학습이 긴밀하게 결합된 성인 학습자 친화적 프로그램으로, 노동 시장에 필요한 스킬셋을 기반으로 대학 학위를 제공한다. 벨파스트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고등 도제 훈련을 통한 산업계와 대학의 상생 모델은 유구한 역사 속 현재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ㅣ고등 교육 (Higher Education)
① 파운데이션 디그리 (Foundation Degrees)
비즈니스 데이터 관리, 건축 기술, 컴퓨팅, 엔지니어링, 보건 및 사회 복지, 스포츠 및 운동 과학 등
② 학사 학위 (Top-up)
사이버 보안, 클라우드 및 네트워크 인프라 등(종종 고등 교육 수준 견습 과정으로 제공)
③ OU(Open University) 인증 과정
오픈 유니버시티와 파트너십을 맺고 패션 생산 및 비즈니스 분야의 학사(우등) 학위와 같은 과정을 제공
ㅣ견습 과정 (Apprenticeships)
현장 훈련과 학문적 학습을 결합한 견습 및 높은 수준의 견습 과정 주요 제공
견습생과 고용주 모두 win-win
견습생은 일하며 급여를 받고 학비는 고용주가 지불하므로, 학생 부채를 줄일 수 있다. 일터에서 경험 많은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며, 첫날부터 실무 기술과 산업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공식 자격증으로는 파운데이션 디그리부터 석사 학위까지 공인된 높은 수준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견습생들은 학문적 지식과 실무 기술을 겸비하고 있어 고용주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인재로 여겨진다. 견습 과정 완료 후 회사에 계속 고용될 확률이 높다. 취득한 자격과 경험은 리더십 역할과 장기적인 경력 성장에 도움이 된다.
고용주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특정 기술을 갖춘 인재 파이프라인을 훈련하고 개발함으로써 기술 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 견습생들은 높은 생산성과 동기 부여를 가진 직원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을 훈련시킨 회사에 더 오래 머무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산성 및 충성도도 증가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보고서에 따르면 견습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기업은 상당한 투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오픈 유니버시티(Open University)는 패션 생산이나 비즈니스 분야 등 일부 학위 과정을 일반 성인 학습자들에게 공유하여 평생 학습의 참여 기회를 높이도록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성인 학습자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학습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다.
도제 훈련생의 경력 경로(Career Pathway of Apprentice)는 도제 훈련생들의 초기 경력뿐만 아니라 중기, 후기 경력 경로를 제시함으로써 수평적·수직적 경력 경로 설계를 제안한다. 산업계별로 특화된 경력 경로를 제시한다면 이직이나 전직의 상황에 시기의 제한 없이 학습을 재기할 수 있다.
기존의 일터 학습은 테크니컬 스킬 중심의 훈련이 이루어졌다면, 현대의 일터 학습은 특정 분야의 스킬 전달 그 이상의 경험을 창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스캐폴딩 교수법은 도제 훈련에 적용 가능하며, 일터와 교육 현장 모두 실행 가능하다.
<장인의 공부> 저자이자 목공예가인 피터 콘은 세상에 무언가 새롭고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인간에게 의미와 성취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우리가 마음 깊숙이 갈망하는 일이라 한다. 일터 학습은 의미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학습 과정으로 재설계되어야 하며, 호모 파베르의 학습 욕구를 분석하고 일과 학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일과 학습, 쉼의 순환고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과 소비, 휴가라는 단순한 순환고리를 도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지만, 호모 파베르인 인간은 일을 잘하고 쉼을 갖고 또 소비하는 것 그 이상을 추구한다.
일과 학습, 쉼이라는 순환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터 내의 학습자를 재정의해야 한다. 또한 HRD 담당자들은 고차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터와 교육 현장을 연계할 수 있는 학습 환경과 요소들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ㅣ호모 파베르적 인재상
북아일랜드 도제 훈련생을 NIE Networks의 임원으로 키워낸 것과 같이 산업계의 인재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사용하고 노후화되면 교체하는 부품이 아닌, 호모 파베르의 성장과 함께 기업, 해당 산업계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는 공동체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단순한 노동자를 넘어 호모 파베르적 인재상을 키워낼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
ㅣ산업계와 교육 기관의 협력적 거버넌스
학습 욕구가 있는 성인 학습자의 수준에 맞는 재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산업계와 교육 기관의 긴밀한 협업이 중요하다. 교육 기관은 노동 시장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스킬을 갱신하고 업스킬링하는 역할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산업계와의 협력적 거버넌스 구축이 관건이다.
ㅣ스캐폴딩의 적용 가능성
멘토와 멘티의 호혜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학습 환경을 구축해야 하며, 이러한 호혜성이 일과 학습, 그리고 신뢰 기반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스캐폴딩처럼 멘티가 성장함에 따라 멘토가 적절한 수준의 개입을 지속한다면, 학습적 효과 뿐만 아니라 업무 수행의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일터 내 고차원적 학습 경험 설계를 위해서는 고등 도제 훈련에서의 스캐폴딩 적용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ㅣ카르페 디엠을 외치는 호모 파베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용기와 지지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만, 점차 학생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지하는 교육자적 모습을 보인다.
키팅 선생님처럼 호모 파베르의 주체적 성장을 돕는 일련의 모습은 우리에게 지식 전달을 넘어선 지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두에게 키팅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키팅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의 호모 파베르는 키팅 선생님의 모습이지 않을까?
문한나 숭실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평생교육학과 부교수
고용노동부 산업전환고용안정전문위원회 전문위원
phd_hrod@ssu.ac.kr
본 글은 한국표준협회미디어(KSAM)의 품질경영 2025년 8월호에서 발췌되었습니다.